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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최현섭 선교사 우간다 3월(2021) 소식입니다.

조회 : 836 0 송지순

사순절을 보내며 예수님을 통해 고난을 묵상합니다. 주어진 고난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았는데, 이 고난이 없는 삶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난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겪는 아픔, 예상치 못한 사고로 인한 절망과 고통, 상실의 슬픔 등에서 우리는 한계를 직면합니다. 원망이 터져 나오고, 믿음이 깨어지고, 소망을 잃어버립니다. 이런 아픔을 모두 체휼 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울고 계시고, 손 잡아주시고, 같이 이겨나가기 원하며 기다리십니다. 故이관희 집사님의 고백이 영화화 되어 고난 앞에 서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신앙을 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고, 그보다 더 전에 뺑소니 사고로 차에 불이 번져 전신화상을 입고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절망을 통과한 이지선 자매님의 책 역시 신앙 안에서 승화된 고백으로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 외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고난을 통과한 이들의 이야기들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 반면, 사탄은 불순종의 죄로 인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어둠의 열매에 대한 책임이 사실 누구에게 있는지 알면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교묘히 이용해 이 모든 것을 알고도 막지 않은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고, 심판자 이신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혀 버립니다. 결국 사탄은 소중한 자녀들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와서 어려움 가운데서도 평안과 은혜 누리기를 원하는 하나님과 귀한 자녀들을 갈라놓은 무서운 죄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자발적 고난에 대한 묵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특별히 고난의 길을 피하기 보다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날마다 자기 부인하며 그 길을 기꺼이 나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삶은 어렵고, 성경에서도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합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임에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많은 시간을 지체하다가 겨우 나서거나 지체에서 정체가 되어 안주하기도 합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허락하신 믿음의 분량이 다를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 마음 속에 동일한 소원은 믿음과 삶이, 말씀과 삶이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삶에서 지행합일이 이뤄지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일들을 종종 경험하곤 합니다. 얼마 전 제가 속한 NGO의 세금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회계사를 만났습니다. 2020년 연말에 이미 다 완료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미비 된 것이 있다는 세무서의 안내를 받고, 귀찮은 마음을 가지고 회계사에게 갔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고, 그에게 일을 맡기려다가 결국 매달 그를 통해 세무서에 신고하는 것이 시간과 비용 면에서 번거롭다고 생각해, 차라리 앞으로 내가 하겠다고 방법을 가르쳐 달라 했습니다. 그거 가르치면서 다른 고객들 응대하고 전화 받으며 엄청 기다리게 하더니, 겨우 1시간도 안 걸려 배웠는데 파트타임(하루 5시간 육체 노동자)의 한 달치 월급을 수고비로 달라는 것입니다. 작년 연말 일을 완벽히 처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애프터 서비스는 기대조차 안 했고 어느 정도 페이를 할까 고민은 있었지만 너무 하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돈 나중에 줄 테니 다시 만나자고 하고 나왔습니다. 저를 믿어서 순순히 보내주긴 했는데, 갈등의 시간이 길어졌고 그 날 보내주겠다고 한 돈을 약 일주일 째 안 보냈습니다. 계속 버틸 수는 없어 일단 다시 만나자고 한 뒤, 제 의견을 얘기했습니다. 1시간도 안 되는 수고비 치고는 너무 크고,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이 받는 월급과 비교했을 때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나름 합리적인 이유를 댑니다. 이 일을 대신 처리해주면 매달 2만~3만의 수고료를 받는데, 1년으로 환산하면 24~36만 정도의 비용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내가 대신 알려줌으로써 당신이 일을 하고, 나는 이 돈을 받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것까지 계산해서 청구한 것이다. 그도 저의 입장을 이해해주고, 저도 다시 한 번 생각하니 합당한 금액이라는 동의가 되기도 했거니와 그가 풍기는 배운 사람의 태도에 약간 압도되어 더 이상 깎지 못하고 돈을 주고 왔습니다. 그와 헤어진 뒤 닭에게 줄 사료를 사러 갔는데, 사료비 외에 사료를 차에 옮겨 실어주는 포터에게 수고비를 줘야 합니다. 일이 고되면서 그에 맞는 대우를 받지 못해서인지 종종 포터가 바뀝니다. 그 때마다 원래 주던 대로 지급하려는 저와 본인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포터 사이에 신경전이 발생합니다. 주로 제가 이기지만 포터가 계속 바뀌는 게 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 더 주니 그도 만족하고, 그가 만족하니 저도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회계사를 대할 때와 이 포터를 대할 때에 제 태도의 다름을 보게 됩니다. 그는 사료를 뒤집어 썼고,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사료 냄새 땀 냄새가 납니다. 그런데 멀쩡해 보이는 저에게서 더 악취가 납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에 대해서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낮은 자들의 친구로 오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아 따르면서 그 분의 보여주신 삶과 들려주신 말씀과는 다른 저의 삶을 보게 됩니다.

 

최근에 일련의 일들을 통해서 아내는 속에 있는 탐심을 발견했습니다. 처음에는 인정보다는 회피하고 싶었습니다. 새벽에 잠이 깼을 때 이 부분을 생각하다가 설교가 듣고 싶어 ‘탐심’ 이라는 검색어로 찾아 설교를 듣고 탐심이 얼마나 영혼을 갉아먹고 부패하게 했는지 알게 되었다며 눈물을 흘립니다. 남의 것도 내 것으로 보이고, 내 것 아닌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쉽게 구할 수 없는 환경을 핑계 삼아 계속 더 채우려 하는 모습을 합리화 했던 것, 더 나아가 남을 판단하고,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조차 자기 중심적 입장에서 이해하려 했던 모습들을 직면합니다. 광야에서 불평하며 고기 달라 했던 탐욕으로 죽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신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다 했습니다. 저도 한 번 들어보았고 여러 설교를 발췌해 봅니다.

 

탐욕이 무엇입니까? 지나치게 집착하는 욕심입니다. 유명한 문호 단테는 탐욕은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원수”라고 지적했습니다. 사실 좀 더 갖겠다는 게 무슨 문제가 되는가? 탐욕은 인간에게만 있는 유일하고 독특한 본능일 것이고, 어떤 면에선 인간다움에 실존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사자는 먹을 만큼만 사냥하는데, 인간은 먹을 만큼만 가지고는 만족을 못합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일하게 만드는 에너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좀 더 가지려는 마음은 끝없는 탐욕으로 발전할 수 있는 나쁜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가지려는 욕구는 적정선에서 자제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10계명 가운데 마지막 계명(네 이웃의 집을, 소유를 탐내지 말라)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9번째 계명은 행동의 계명이지만, 10번째 계명은 행동이전의 마음의 계명입니다. 내가 손으로 훔치지 않았어도 마음으로 욕심을 내고 그것이 탐욕화되면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로 살다 고기 먹고 싶다는 충동이 전염병이 되어 수십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를 내 놓으라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광경을 보고 얼마나 진노하셨는지 하루 아침에 메추라기를 수북하게 허락하시고 아직 이 사이에 고기가 남아 있을 때에 불평한 사람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일컬어 ‘기브롯 핫다아와’ 곧 탐욕의 무덤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고기를 먹고 싶으니 내놓으라는 것이 용납할 수 없는 탐욕인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을 탈출해 구원 받고 광야로 나와서도 물 한 모금, 먹을 것 하나 없는 곳에서 때마다 주시는 물과 매일 내려주시는 만나로 살 수 밖에 없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에서 감사하지 못하고 고기를 달라 한 것은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탐욕이었습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를 잊어버리면 탐욕에 빠집니다. 탐욕의 부작용은 감사를 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불신하는 탐욕이었습니다. 마실 것 먹을 것 없는 광야로 인도하시면서도 하나님은 때마다 베푸실 계획을 가지시고 계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단 한 가지, 광야의 시간 속에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면 다 주신다는 것인데, 그들은 이 믿음이 사라졌던 것입니다.

셋째, 악한 자들의 충동을 받은 탐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섞여 살던 다른 인종이 있었는데,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믿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먼저 불평을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아직도 감사하지 못하냐고 호통을 치지 못하고, 전염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날마다 불신 사회에서 나오는 소식들로 인해서 자극도 받고 충격도 받습니다 우리도 잘못하면 이스라엘 백성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을 받고 그 말씀에 도전을 받아야지, 세상 사람들의 말에 영향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탐욕이 되기에 눈과 귀를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극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습니다.[1]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네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라” 만약 예수님이 오셔서 나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무어라고 대답할까? 무엇이라고 변명할까? 지금까지 믿음 생활 잘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주님이 믿음을 탓하지 않는다, 행위를 놓고 따지신다. 말만 살았다고 하지 실상은 죽었다는 것 아닌가? 사람 보기에는 그럴 듯 하고 하자가 없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펼쳐 놓고 볼 때에 하나님이 인정할 만한 것이 없다. 이런 앞뒤가 다른 모순을 안고 있는 신앙생활을 일컬어서 오늘날 크리스찬의 세속화 라고 말한다. 교회에 와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 할렐루야 하지만, 실재로 교회 밖을 나가면 세상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 주님의 눈에 내 자신의 삶이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주님께서는 자기 교회를 진단하실 때 양 때문에 책망들은 교회가 없다, 칭찬을 들었던 책망을 들었던 주님의 최대 관심사는 질이었다. 이거 숨막히는 이야기이다. 한국교회 성도들 너무 돈을 사랑한다. 얼마나 도덕성이 마비되었는지 돈 앞에 맥을 못 춘다.[2] 변화를 사모하면서도 변하지 않고, 세속화가 될 대로 되어 버린 신앙인.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하는데, 그게 자신이었다고 생각하니 이런 회개가 나옵니다. 주님, 제가 너무 추악하고, 신앙인으로 살면서도 성경 중심의 삶이 아닌 자기 중심적으로 오래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저는 감사의 은사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감사의 고백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인간은 겨우 100년을 살지만, 만약 10억년, 그보다 더 무한대로 산다고 가정했을 때 자기 중심적으로 살면 사탄이 된다고 하는데, 40년도 못 살고 이 모습이기에 계속 이 자기 중심적 삶에서 돌이키지 못한다면 내가 믿고 소망하는 바와 전혀 다르게 살다 죽을 것입니다. 영혼에 대한 심각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근데 저도 변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변해야 할까요?

 

이 기도 이후 가정 예배에서 “뺏어가시는 예수님”에 대한 나눔을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그 동안은 베푸시고 자비하신 주님에 대해 전했기에 제목을 의아해했지만, 잘 이해해 주었습니다. 산이는 속상한 마음을 가져가 주셨으면 좋겠다 했고, 강이는 미워하는 마음을 가져가시도록 드리겠다고 했고, 저는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화를 드리고 가져가 주시길 기도하겠다고 했습니다. 눈치를 살피며 물어본 아내에게서 돌아온 답변은 “자유”였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자유를 가지고 마음 속에 잘못된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통해 드러나는 죄 된 행동과 자신이 싫다고 합니다. 십자가에서 죄와 멍에의 사슬을 끊고, 우리를 죄에서, 율법에서 자유케 하셨기에 예수님께서 자유만큼은 가져가실 수 없는데, 하필 그걸 골랐다는 게 참 의미심장했습니다. 그래도 현재 아내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아내와 계속해서 좋은 대화들을 나누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바르게 깨닫는 것이 변화의 시발점이고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참 귀하지만, 하나님이 이런 자신을 사랑(구원)하지 않으실 것에 대한 불안이 동기로 작용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아이들에게 무섭게 경고하면서 어떤 명령을 내렸는데, 내가 없으면 하고 있으면 안 하는 걸 쉽게 봅니다. 그러나 사실 아빠가 내가 잘못 하건 잘 하건 나를 계속 사랑하고, 내가 진짜 나를 용납할 수 없을 만큼 잘못해서 두렵고 괴로울 때도 한결 같은 사랑으로 나를 안아줄 때, 아이는 그 사랑을 힘입어 변화됩니다. 아빠를 향한 사랑 때문에 아빠의 뜻을 구하고, 아빠의 마음을 묻고, 아빠에게 나아옵니다. 자신에 대한 진지한 회개를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뜨겁게 경험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일한 마음으로 우리 가정을 위해 기도해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그리고 기도해주시는 분들과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먼저 그 놀라운 사랑을 함께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내는 내면적으로도 힘든데 육체적으로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지난 달에 야심 차게 운동을 시작했는데, 출산과 수유로 인해 고관절이 약해진 상태에서 다리에 무리가 왔습니다. 다리를 절게 되었기에 일 하기도 힘들었고, 아이들과도 엄마를 도와주자고 해서 나름 힘을 보탰지만 온전한 휴식을 취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몇 주 고생한 뒤 조금씩 회복이 있었고 지금은 운동을 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 세 명 모두 잘 걸리지 않던 감기에 걸렸습니다. 강이 산이는 그래도 큰 어려움 없이 이겨냈는데, 들이가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이 계속 되다 새벽에는 경기 증세를 보여 가슴을 쓸어 내렸습니다. 다행히 아내가 깨어있어 응급 조치를 했기에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한 차례 거쳐야 하는 단순 돌 치레 / 돌 발진인지, 요로 감염인지 알 수 없었고 며칠 째 컨디션 난조로 짜증내고 우는 아기를 보자니 많이 힘들었습니다. 소변 검사가 정상으로 나왔고, 소변을 받으려다 물 설사를 소변인지 헷갈려 제출했다가 기생충도 발견하고 구충제도 먹였습니다. 조금씩 열이 내리고 몸에 열꽃이 피는 걸 보니 돌 발진이어서 다행이었고, 지금은 다시 잘 웃고 잘 놀고 잘 먹는 아기로 돌아왔습니다. 집안에도 다시 생기가 도는 것 같습니다.

 

강이와 산이는 체력단련을 위해 동네에 알고 지내던 코치와 아침 운동을 합니다. 둘의 운동 능력에 차이가 있다 보니 산이가 힘들어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옆에서 응원도 해주고, 잘 따라하지 못하는 동작은 알려주고 따로 연습도 시키며 동기를 더해줍니다. 약간 무리해서 더 연습을 시켰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고 힘이 들어 괴로워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못할 만한 것은 아니고, 조금만 연습하면 따라갈 수 있는데 힘들다고 포기하면 계속 강이와 같이 하기 힘들 것 같아 반복을 하니 곧 잘 할 수 있게 되고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체력의 문제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왕복 달리기의 경우, 산이는 3번만 해도 헉헉 대는데 코치가 10번을 시키니 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새 우는 언니를 본 들이가 가서 안아주었지만 몸과 마음의 힘듦으로 눈물이 계속 납니다. 그 때 산이에게서 제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빠는 산이가 잘 할 수 있도록 힘을 주고 연습도 시켜주지만, 그 아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할 때는 딸을 위하는 아빠로서 멈추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코치한테 훈련의 강도를 낮춰달라고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아빠와 코치라는 두 명의 어른, 권위자 앞에서 힘들다고 말하기 보다 계속 달립니다. 저에게도 버거운 상황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려놓기 보다는, 계속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충성과 훈련의 차원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분명 성장은 있지만, 무리한 것은 반드시 탈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오해로, 내가 이것을 계속 하기를 바라고 그렇게 했을 때에 주시는 은혜, 변화들에 초점을 맞출 뿐, 정작 내가 무리되어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 하시고, 쉬어도 된다 라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코치 역할을 하는 나를 훈련시키는 상황, 사람들에게 페이스를 조절하도록 이야기해도, 코치들이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채기 어려운 함정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실 나와 이런 코치들까지 수준에 맞게 다 조정하시며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고 성경에 나와 있는데, 나에 대해 상황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오해를 하면 무리가 따르고, 어려움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저는 충성이 강박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기에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저에게 주님은 좋은 방법을 안내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아주 단순한 믿음 안에 거하고,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영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고난과 훈련을 통과하는 방법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힘과 내 지혜를 의지하게 되는데, 나는 내 기준, 수준에서 정죄하려는 유혹을 받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어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게 됩니다. 많은 고난과 훈련들 중에서 사람과의 관계로 인해 직면하게 되는 어려움이 상당합니다. 분명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도 있을 것이고 저도 그러하기에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생각하며 다윗의 여정을 따라가다가 발견한 귀한 본문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친 뒤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게 됩니다. 그 결과 사울 왕의 질투를 받게 되었고, 결국 아무 잘못도 없이 죽을 위기에 놓여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그러던 중 다윗이 사울 왕을 두 번이나 죽일 수 있었지만, 다윗 스스로가 “여호와의 기름부으신 자”를 죽이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부하들을 말렸습니다. 계속 이렇게 쫓기다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음에도 말리는 다윗을 부하들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처럼 놀라운 절제력을 보인 다윗에게 얼마 뒤 다른 사건이 발생합니다. 다윗은 강도가 들끓는 광야에 지내면서 목동들이 양을 치다 피해 입지 않도록 그들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양털을 깎는 날을 기념해 잔치를 준비하는 나발이라는 목동에게 조금의 먹을 것을 부탁했는데, 그간 정말 감사하다는 인사와 환대가 아닌 멸시와 모른 척을 당하게 됩니다. 다윗은 부하들에게 칼을 차라고 명한 뒤 나발을 죽여버리러 가자고 합니다. 너무나 대조적인 다윗의 모습입니다. 이 때 분기탱천한 다윗 앞에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이 나타납니다. 그는 나발의 아내로, 성품과 지혜 아름다움을 겸비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내 칼을 거두고 살인의 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어리석은 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우리를 몹시 화나게 만든다. 그러나 그들을 바로잡아 주겠노라고 나서면서 우리 자신도 그들과 같은 어리석은 악독에 빠지는 때가 많다. 누군가가 우리를 불쾌하게 하고 방해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 속의 거만한 자아는 불끈 해져서 두고 보자고 난리다. 대개 의분으로 무장해서 말이다. 자신에게 싸여 버린 우리는 스스로가 규정한 정체성이 침해 받자 분을 내는 것이다. 마음과 자아상에 상처를 입었다며 보복하겠다고 벼른다. 반드시 갚아주겠다. 두고 보자. 뭔가 보여주겠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는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만난다. 아이나 친구 혹은 낯선 사람, 구름이나 노래 혹은 향기. 바로 아비가일이다. 그 아비가일은 우리에게 우리의 감정과 행동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를 준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나의 이런 감정과 행동은 나의 참된 정체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는다. 우리는 자신에게 싸여 있어서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보자기에 싸여 있는 존재임을 보게 된다. 나발은 기껏해야 우리 삶의 본문에 들어올 수 없는 각주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으면서 말이다.

 

나발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영성이 아니다. 어리석은 자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 영성이 아니다. 오만 불손하고 저속한 갈렙 족속의 개 나발이 어리석은 자라는 사실이 파악되었으면 그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진척시켜야 한다. 다윗은 바로 그렇게 했다. 아비가일이 나타나면-문득 우리에게 다가오는 아름다운 노래나 얼굴, 미루나무나 붓꽃-우리는 자신을 더 크고 참된 빛 속에서 볼 수 있게 된다. 다윗은 거대하고 방대한 하나님의 세계-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기도와 거룩-속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시시하고 속 좁은 보복심에 사로잡혀 그만 그런 삶을 상실할 뻔했다. 그러나 아비가일의 아름다움-성품과 용모의 양날을 갖춘 아름다움-은 그에게 주님의 아름다움을 회복시켜 주었다. 무릎을 꿇은 아비가일은 다시 다윗이 무릎을 꿇게 만들어 주었다.

 

다윗은 아비가일과의 만남에서 그녀의 아름다움을 통해, 자기 자신 안에 내재해 있는 것을 알아보게 된다. 바로 다윗 자신 안에 있는 거룩의 아름다움을 알아본 것이다. 복수심에 사로잡혀서 자존심을 지키고 피를 보려고 달려갔던 다윗, 바로 자신에게서 말이다. 그는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였고 그의 안에는 영광을 받으셔야 할 하나님이 계셨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아름다움이라는 거울을 통해 하나님이 다윗을 바라보셨던 대로 자신을 본다. 아비가일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셨던 정체성을 회복시켜 준 것이다. 다윗은 후에 기도를 통해 나발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났다.[3]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발, 그 나발과 같이 동일하게 어리석은 다윗이 되어 있는 내게 아비가일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은혜가 있어도 깨닫지 못하는 아둔함이 문제입니다. 아비가일을 발견하고 깨닫는 것이 깨어있는 영성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어느 새 내가 심판자가 되어 상대방에게 오물을 뒤집어 씌우고 맙니다. 그러나 결국 나 역시 그 오물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 후회해도 때는 늦습니다.

 

이번 소식지는 쓰면서 참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고난에 대한 묵상들을 풀어내며 평소보다 무거운 내용들로 채워진 것 같고, 이 소식지 수신자들의 다양성을 고려하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성찰을 해봅니다. 제 부족한 삶과 생각일지라도, 솔직한 얘기를 답장으로 보내주시는 분들이 계셔 힘이 됩니다. 이것이 어려움을 드리지 않기를 바라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은혜 주시길 소망합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 베드로 전서 2장 19~25절 말씀

 


[1] 옥한흠 목사님 설교, 출처 유튜브 채널 CBSJOY 『탐욕을 조심하라』 민수기 11:1~9,31~35

[2] 옥한흠 목사님 설교, 출처 유튜브 채널 3분 말씀 묵상

[3] 유진 피터슨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다윗과 아비가일 편

덧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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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명근   2021-04-08 21:54
아... 울 가난한님....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