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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최현섭 선교사 우간다 6월(2021) 소식입니다.

조회 : 999 1 송지순

2021년의 절반이 지났습니다. 사람들의 이동도 경제활동도 봉쇄해 놨지만, 시간의 흐름 만큼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시간마저 흐르지 않는다면 속히 벗어나고픈 이 답답함에서 더 절망을 느꼈으리라 생각하는 한편, 상황의 변화를 소망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누릴 수 있는 놀라운 은혜들을 더 붙들게 됩니다. 그 복음, 좋은 소식이 힘겨운 이웃들에게 위로와 평안이 되길 기도합니다.

 

가정 예배에서 가장 전하기 싫은 메시지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저의 부끄러운 모습을 직면하고, 아이들 앞에서 정직하게 나누는 것이 아직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특징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함으로 자신을 고립시킵니다. 고립될수록 사탄은 더 가까이 다가와 유혹합니다. 거짓 없는 진리 안에 거하려면 정직해야 하고, 자신을 개방해야 합니다. 투명할수록 좋습니다. 너무 완벽 하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멋진 모습을 보여주려고 집착하다가 심각한 위선, 거짓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신앙은 더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더 정직해질 것인가의 싸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정직해져야 합니다 라는 문구가 용기를 주었습니다. 제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약자들이 있습니다. 나이의 약자, 언어의 약자, 예절의 약자 등 입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저보다 힘의 약자이기도 합니다. 이들의 나이, 말버릇, 태도 등이 거슬릴 때가 있습니다. 잘 참다가도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이나, 선을 넘었다고 생각될 때, 벼르던 것이 터질 때에 이웃집 애들한테는 까칠한 아저씨로, 우리 딸들한테는 엄한 아빠로, 심지어 기르고 있는 고양이한테는 피해야 할 주인이 되곤 합니다. 제 나눔을 듣고 아이들도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어떻게 대하는지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언니는 동생에게, 아빠한테는 그렇게 못하면서도 엄마에게는 어떻게 대하는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엄마는 몇 이웃들에게 가지고 있는 마음 속 생각이 향기롭지 않다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회개하며 주님의 주시는 은혜와 긍휼을 구했습니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자주 부르던 어린이 찬양의 가사가 새로운 은혜로 다가옵니다.

 

위에 고백했듯이 저는 상식과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실 이웃 아이들이 저를 그렇게 대하는 것은 아직 잘 배우지 못했고, 그것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긍휼히 여기고 어른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가르쳐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귀찮고 고되기에 그저 단정짓고 피하고 싶습니다. 또 내 자녀가 아닌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조심스럽기에 그런 상황을 지켜보며 우리 아이들을 보호하느라 힘이 들기도 합니다. 아직 내 자녀에 대한 애착이 커서 다른 아이들까지 품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때로 어린이들에게 주님의 마음을 부어주실 때가 있습니다. 제가 어떤 놀이를 가르쳐주고 함께할 때 아이들의 즐거운 표정을 보는 것은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아이들이다 보니 저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계속 요청하는 때나, 놀아주다 보면 저를 어른이 아닌 친구처럼 대할 때 기분이 안 좋아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어린이들의 마음이 실족하지 않도록 제 마음을 잘 지켜나갈 수 있기를 기도 부탁 드립니다.

긍휼의 마음이 흐를 때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아이들에게 선행을 베풀기도 합니다. 몇 달 전 고난주일에 한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굶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써주면 좋겠다는 뜻으로 주님의 사랑이 흘러가는 통로의 재정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후로 일부러 물과 음료, 빵 등을 사서 가지고 다니다가 그런 아이들이 보이면 조심스럽게 불러서 이름을 묻고, 기도해주고 축복해주고 한 봉지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는 아이도 생겼고, 그냥 이렇게 불규칙적으로 음식을 조금씩 나누기 보다 집이나 고아원으로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작년에 계란이 많이 남았을 때 이런 사역을 하는 솔로몬이란 청년과 연결이 되었던 게 생각이 났습니다. 제 힘으론 할 수 없어서 엄두가 안 났는데 일단 솔로몬과 그 아이들을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원래 만남 약속을 정한 친구는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고, 대신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 하며 솔로몬을 기다렸습니다. 그 때 다른 지역에서 사역한다는 조셉 목사님이 제가 어려워하는 것을 느끼시고, 옆에 오셔서 제가 얘기 나누는 아이들의 더러운 손도 잡아주고 그들이 잘 아는 언어로 대신 대화를 이어가 주었습니다. 아이들을 만나러 나간 버스 터미널은 코로나의 급속한 확산으로 버스 운행 중지가 되어 예전과 달리 사람들이 없어 황량해져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구걸하고 살아가던 아이들에게도 너무 어려운 시기가 되었습니다. 휘발유 묻은 헝겊을 코에 대고 흡입하며 배고픔과 어려움을 잊으려다 이미 거기에 중독이 되어 헤어나오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다고 합니다. 솔로몬과 여러 단체들이 힘을 모아 마련한 시설에서도 때마다 나오는 밥, 씻고 빨래하고 비와 추위 모기를 피해 잘 수 있는 안락함을 버리고 이내 다시 거리로 도망을 가는 대부분의 이유가 휘발유 흡입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이들을 시설로 인도하고 싶다고 했을 때 솔로몬의 입장은 회의적이었습니다. 다만 거리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들은 다시 집에 돌아가 정착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조셉 목사님과 얘기하는 사이에 솔로몬이 오면 소개해주고 얘기 나눠보려 했던 아이가 사라졌습니다. 다시 찾아보았지만, 더 좋은 일에 대한 기회를 스스로 거부하고 한 봉지 조그만 음식에 만족하고 떠났습니다. 그 때 계속 주변을 서성이던 다른 아이가 솔로몬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거리에 나온 지 한 달 조금 넘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옷이 아주 더러워 보이진 않았습니다. 그 아이에게 집에 다시 가고 싶냐고 물어보니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나 집에 가고 싶다고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집 안에 폭력은 없는지, 부모님과 관계가 어떠한지 알아봐야 하고 또 집에 데려다 주는 여러 방법 중에서 한 가지를 잘 택해야 한다고 솔로몬에게 들었습니다. 휠버라는 이름의 아이는 새 어머니가 잘 돌봐주지 않아 힘들지만 아버지와는 관계가 괜찮다고 했고, 동네 이름과 집을 찾아갈 수 있다고 하여, 정부 기관을 통하지 않고 저와 솔로몬이 직접 데려다 주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집도 우리 농장 방향이어서 일단 농장으로 데려 갔고, 지역간 이동이 금지된 봉쇄 기간이라 농장에서부터는 경찰의 눈을 피해 솔로몬과 휠버만 오토바이로 이동하기로 했습니다. 휠버와 집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농장에 도착해서, 먼저 더러운 옷을 벗고 목욕을 하라고 했습니다. 목욕을 하며 옷과 신발을 빨래 했고, 제가 가지고 있던 새 옷을 입혀주었습니다. 휠버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나도 너와 같았다, 죄로 더러웠고, 예수님 앞에 서 보니 그제서야 내 더러움을 알고 고백하고 용서해달라 했다. 예수님이 씻겨주시고 용서해주시고 새 옷을 입혀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해주셨다. 그리고 나중엔 하늘 아버지 집에 데려다 주실 거다. 지금 너도 그렇지 않냐? 는 질문에 휠버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솔로몬이 휠버가 기도를 따라할 수 있도록 인도했고, 휠버가 회개와 예수님을 영접 하는 기도를 마쳤습니다. 휠버가 아버지와 만나 용서를 구하고, 집에 다시 정착할 수 있도록 축복했습니다. 매일 병아리와 닭만 키우던 농장의 직원들도 불쌍한 소년을, 영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 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오토바이 뒤에 태워 휠버를 보내고도 계속 기도했습니다. 경찰이 없는 길을 피해 돌아가느라고 1시간 30분이 걸려 그 동네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휠버가 집을 잘 기억하고 있었고, 다만 아빠가 일하러 나가 계시지 않아 삼촌을 통해서 솔로몬이 아버지에게 휠버의 귀가 소식을 알렸습니다. 휠버를 용서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아버지는 용서한다고 했습니다. 경험이 많은 솔로몬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웃과 동네 이장님까지 만나서 상황을 설명하고, 이 아이가 다시 거리에 나오지 않도록 관심과 돌봄을 부탁했는데 거기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장님이 이 아이가 도둑이기 때문에 걱정이 된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 말을 한 이장 어른과 휠버 할머니와 또 다른 이웃의 돈을 훔쳤었고, 잡혔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집을 나와 도망가기로 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휠버에게 이 사실을 물어보니 다행히도 그렇다고 인정을 했고, 이장님과 할머니, 이웃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른들이 사과를 받아주고 용서해 주셨고, 두려움과 불신이 흴버에게서 떠나가고 자유와 안도가 찾아왔습니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솔로몬도 함께 사진을 찍고 그 분들과 번호를 교환한 뒤 다시 오토바이로 경찰의 눈을 피해 겨우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렇게나 수고를 해준 솔로몬 덕분에 저 혼자서는 감히 할 수 없었던 일이 아주 훌륭하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솔로몬에게 거듭 감사를 전하며 생각난 성경 구절을 나누었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는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누가복음 15:4~7) 솔로몬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우리가 하지 않는다면 이 땅에서 이 일을 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책임감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휠버를 집에 보낼 때 농장에서 닭 한 마리를 들려 보내야 하나 고민했을 때 아이를 집에 돌려보내는 것 까지만 책임지고 그 이후부터는 그 가족이 책임지게 해야 한다는 조언을 솔로몬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기적같이 돌아온 아들을 기뻐하며 잔치할 때 닭 한 마리가 있었으면 더 풍성했겠지만, 그것이 없어도 아빠와 아들, 형제들간 재회의 기쁨이 가득하길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휠버가 도둑질에서 떠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길 기도했습니다.

 

오늘도 하늘에서는 잃어버린 영혼이 돌아와 기쁨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 돌아온 영혼이 새로운 인생을 살고, 또 누군가를 구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고,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휠버를 통해 제가 주님께 돌아오게 된 은혜를 다시 떠올려 보았습니다. 마음과 믿음이 없이,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다니던 교회가 이제 의미가 없다고 고뇌하던 시절에, 청년부 누나 형들과 모임에서의 나눔이 생각납니다. 나는 착하게 살고 있다, 사실 교회에 다니면서도 나쁜 사람들 위선적인 사람들 많은데 나는 그런 사람들과 달리 이중적으로 살고 있지 않다, 그런데 교회를 안 다닌다고 나 같은 사람이 심판을 받고, 교회에 다닌다 해서 이중적인 사람들이 심판 받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 이제 막 20살이 된 제가 갖고 있던 자아에 대한 인식이 겨우 저 수준이었습니다. 그 동안 진지하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못한 채 입시에만 매달려 왔고, 아무리 그렇다 한들 내 자신을 성찰하는 힘이 고작 저 정도였다는 게 부끄럽습니다. 만약 거기서 내 자신을 보지 못하고, 계속 타인을 보며 정죄하는 동시에 나는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면, 자아라는 감옥에 갇혀 자신의 의를 쌓아나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의 대상인 내가 심판자가 되어 하나님도, 사람들도 피고 취급하는 교만한 인생이 되었을 텐데, 이런 교만한 저를 내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내 참 모습을 보게 해주셨습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라는 수건에 쌓여 보지 못했던 추악한 제 모습이 주님의 거룩함 앞에서 드러났을 때 비로소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는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숨겨 왔다는 것도 모른 채 살았다가, 숨겨왔던 모습이 드러나려고 하자 숨기고 싶었으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정죄하는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마치 자신이 1급수 같이 깨끗하다고 여길지라도, 실상은 변기 안에 있는 물보다 더럽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는 말씀이 야고보서에 있습니다. 이처럼 남을 가리치는 자, 강단 위에 서서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들이 언론에 많이 소개되고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조롱거리가 되고, 하나님을 욕 보이며, 신실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가리우고 덕을 끼치지 못해 신앙인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럴지라도 그들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의 몫이고, 우리는 위선을 경계하되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다르다는 착각에서 빠져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 뜻대로 되지 않고, 은혜의 영역입니다. 소망하는 자에게는 그 은혜가 임할 것이고, 은혜를 경험한 자는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이었는지 깨닫고, 살인하는 자나 아주 이기적이고 비상식적인 사람과 내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런 나에게 베푸신 용서가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지를 고백하게 됩니다.

 

인생마다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신분과 성별이 그랬고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사회 체계가 그렇고, 우간다 같이 발전이 더딘 사회에서는 가난이 그렇습니다. 역사가 발전하면서 법적, 제도적으로 이것들로 인한 불평등을 받지 않도록 조치해 놨으나 그것이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지는 못합니다. 상대적 행복이나, 비교로 인한 상실 등이 나타나고, 많이 가지면 유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늘 평안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또 자녀가 그 삶을 이어가기를 바라며 공정하지 않은 비리를 저지르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또 부모의 기대와 헌신에 보답하고 싶으나 능력이나 의지가 부족하기도 하고 워낙 경쟁이 치열해 지친 나머지 벌써부터 패배자가 된 기분을 느끼고 살아가는 청소년, 20~40대 청년들도 많습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이 굴레를 벗고 싶은 간절한 갈망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굴레가 너무 괴로워서 스스로 벗기 위해 생을 포기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을 때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죄에 대한 용서만이 아닌 이 무거운 짐을 가져가 주시고, 참 된 만족과 자유를 주실 수 있는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 안에서는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건강한 자나 아픈 자나, 삶이 윤택하거나 곤고하거나 어느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 농장의 아이다 아주머니는 남편을 잃고 자녀도 타지역에 살아서 외롭고 힘들지만 늘 평안이 흘러나오고, 꾸미지 않아도 아름다워 보이십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는 사도 바울의 또 다른 고백이 있습니다. 우간다에 와서 우간다인들처럼 살지 못하지만, 그들의 웃음과 여유를 보며 나를 포함한 한국의 신앙인들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들이라고 완벽하지 않고, 가진 자들은 누구 못지 않게 탐욕이 있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이 가진 자가 조건과 상황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비천과 배고픔과 궁핍에 처한 자가 참 된 예배를 드린다면 그 감사는 온전한 것임을 믿습니다.

 

저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도 이 곳에서 정서적인 빈곤을 느끼곤 합니다. 사람이 그립고, 연락이 오면 반갑다가 이제는 기대하지 않고 고독에 익숙해진 것 같으면서도 가끔 실망도 하고, 자책도 하게 됩니다.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 란 시를 참 좋아했는데,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는 구절이 특히 와 닿습니다. 그러나 고독이야 말로 주님 앞에 나아가 대면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간절히 사모했었는데 막상 겪어보니 어울렸을 때의 소속감과 유대감이 그리워 집니다. 타국에서의 삶. 이방인의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자신의 조국만 좋아하는 사람은 아직 어린아이와 같다. 어디를 가도 자신의 조국처럼 느끼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 세상 모두가 다 타국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야말로 완성된 사람이다. 12세기 유럽의 사상가 성 빅토르 휴의 말을 떠올려 봅니다. 사명이 있기에 부름 받아 온 곳을 타국이라 느끼면 안 되고 내가 살아야 할 곳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이 사명의 땅마저 영원히 살게 될 본향의 그림자로 여길 수 있습니다. 한국도 우간다도 잠시 머물 뿐입니다.

 

우간다의 코로나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작년과 같이 올해도 강력한 봉쇄 조치에 들어갔습니다. 사전 예고 없이 바로 시행된 조치에 너도 나도 당황할 수 밖에 없었고, 서민들의 삶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저도 농장에 가기 위해 차량 이동 허가를 받기 위한 신청서를 냈지만, 일주일도 넘게 답이 없었습니다. 강한 조치에 행정과 시스템이 뒤따라주지 않으니 여러 불편함이 있습니다. 마침 이번 달부터 꿈의학교로 새로 부임한 졸업생 출신 선생님과 자연 농업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며 독려하고 과정과 결과를 공유하기로 했는데, 농장에 가 볼 수 조차 없게 되니 막막했습니다. 또 적정기술을 연구하고 발표하는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된 꿈의학교 제자들에게서 연락이 와 올해 연말까지 시험해 보려고 하는 파리 유충 급여 순환 시스템을 소개하고, 함께 도전해 보자고 했는데 이것 또한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워낙 감염병이 심각하기에 현재로선 통제할 수 밖에 없는 우간다의 현실이 안타까우면서도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더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방법을 수소문해서 겨우 통행증을 받아 약 10일 만에 간 농장인데, 농장 거의 다 와서 타이어가 터지고 스페어 타이어로 겨우 교환했으나 그것도 터져서 난감하고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이 어려운 상황을 버티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다시 마음을 잡았고, 타이어 교환, 자주 올 수 없는 동안 사료 수급 문제, 토마토를 잘 관리하기 위한 논의 등을 하나하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작년 12월 말에 우리 농장 계란으로 부화해 백신, 항생제, 공장형 사료 일체 없이 순수 우간다식 자연농업 방식으로 키운 병아리가 약 만 6개월, 정확히는 185일 만에 드디어 첫 계란을 낳은 것입니다. 병으로 죽은 것은 하나도 없었고, 색깔과 빛깔이 정말 건강해 보였지만 과연 계란을 낳을 것인가에 대해선 의심도 들었는데, 저와 직원들의 예상보다 빨리 산란을 시작해서 놀랐습니다. 암탉 8마리중 한 마리가 산란을 했으니 현재 산란율은 12.5% 입니다. 어제 오늘 낳은 겨우 2개의 계란을 차에 싣고 오는데 만선의 기쁨을 누리는 듯 했습니다. 상태와 맛을 보기 위해 껍질을 깨고 계란 프라이를 했는데, 말로 설명하기 힘든 다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너무 감사하고 기쁜 반면, 개체수를 늘리면서 이 방법을 할 수 있는 연구와 시도에 대한 부담도 동시에 들었습니다. 또 한걸음씩 실험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제일 어린 들이도 배변훈련을 위한 시도를 다시 하고 있습니다. 늘 천 기저귀를 쓰는데, 빨래도 힘들도 처리도 힘들어서 아내도 저도 손목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가끔 시판 기저귀를 쓰면 피부에 꼭 트러블이 생겼습니다. 이제는 천 기저귀를 채울 때도 배변 시마다 아파해서 괴로움을 덜어주고자 시도하고 있는데, 기특하게도 잘 해주고 있습니다. 들이가 연습하는 아기용 좌변기에 갑자기 고양이도 쉬를 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하나의 변기를 두고 들이와 고양이가 경쟁하는 모습이 우습기도 신기하기도 합니다. 원래 모래 없이 화장실에 가서 한쪽에 배변을 하던 똑똑한 고양이가 다시 자기 자리를 찾아가면 좋겠습니다. 강이 산이는 이 시기를 많이 힘들어 하면서도 때가 되면 책 읽기, 한글, 산수, 성경 읽기, 식사 전 말씀 암송, 학교 입학 준비를 위한 영어 등을 나름 즐기며 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에게 배워 검은 띠를 딴 우간다 오빠들이 대회 준비 겸 연습을 하러 오는 길에 집에 들러 태권도 강습도 받게 되었는데, 기분 전환이 되고 있습니다. 아내의 기도제목은 내면의 변화입니다. 은혜의 통로가 되는 기도, 통독, 암송 등을 하면서 그 받은 은혜를 가지고 결국 은혜의 목적인 용서 인내 사랑이 드러나길 소망합니다. 성경을 통해 성품 공부를 시작할까도 생각하는데 애들과 함께 있어서 혼자 시간을 내기도 집중하기도 어려운 상황 입니다. 그래서 영어 공부도 운동도 지속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곤고한 모습을 보게 될 때 이 사망의 몸에서 아내를 건져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로 채우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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