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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최현섭 선교사 우간다 10월 소식입니다.++++++

조회 : 168 0 송지순

2020년 10월은 제가 너무 모르고 살았던 세상과 조우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것을 많이 되새긴 시간이었습니다. 캐서린이란 자매는 이웃에서 일하고 있다가 코로나의 위험성이 커지며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사정이 너무 딱해 간혹 우리 집에 와서 일하기도 했는데, 결국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케냐 국경의 도시로 몇 달 전 떠났습니다. 떠날 때에도 여기 있는 짐들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난감한 상황을 해결해 주어 겨우 떠나고 일자리를 구했으나 계속된 임금 체불로 인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다시 이 도시로 돌아왔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사정이 딱했지만, 저희로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이는 셋이나 있고 남편은 그 자매를 떠난 지 오래입니다. 생계조차 아내의 몫으로 남겨 버린 무책임한 남편 없이 삶의 무게를 혼자서 감당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자매인 도린도 비슷한 상황이었다가 작년에 새로운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 자매에게도 애가 있고, 남편에게도 전부인과 낳은 애가 있는데, 가정을 이뤘지만 둘 다 일을 하며 엄마의 핏줄은 엄마 쪽에서, 아빠의 핏줄은 아빠 쪽에서 각자의 몫으로 담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다 새 남편과의 관계에서 다시 임신을 했고, 아이를 출산하기 전까지 일을 하다가 한 달간 쉬고 이번 달에 다시 일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럼 신생아를 누가 돌보냐? 엄마 없는 동안 애기가 울면 무엇을 먹이냐? 물어보니 괜찮다고, 우간다에서는 일 할 수만 있으면 다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여동생이 있는데 모유를 먹일 순 없으니 그냥 달래주고 옆에 있어줄 뿐, 형편상 분유를 사다 먹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간다 아이들은 순해서 못 먹는다고 계속 울지 않고 다시 잠이 든다고 합니다. 그러니 엄마도 하루 종일은 아니지만, 몇 시간 정도 아이에게서 떨어져 일과 신생아 육아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순하다고 한들 분명 아이들마다 성격도 다르고 건강 상태도 다를 텐데, 그렇게라도 일하지 않으면 가족 모두가 먹고 살기 힘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 시간을 견뎌야 하는 갓 태어난 아기가 배고픔에도 익숙해지고, 엄마의 부재 속에서 강인함을 체득할지도 모르지만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 아기보다 더 자란 아이들 중에 다 알지 못하는 사정으로 집을 떠나 town에 나와 구걸하며 생활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초등학생보다 어려 보이거나 고등학생만큼 커 보이는 아이들까지 다양합니다. 코로나가 퍼지면서 초기에 봉쇄령이 내려졌을 때는 거리에 사람이 없으니 구걸도 할 수 없어 어려워진 이 아이들 중 상당수가 NGO들의 도움 아래 집으로 돌아갔고, 집에서 캐어가 안 되는 아이들의 경우는 학교를 빌려 공동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갈 때 마다 아이들 수가 줄어들었고 그 이유를 물어보니 drug에 중독된 아이들이 그걸 못하게 하니 못 견디고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거리에 나오면 배고픈 아이들이 구걸을 해 번 돈으로는 빵 하나 사 먹기도 힘들 텐데 어떻게 drug를 살 수 있냐고 하니까 싼 휘발유? 등을 사서 병에 넣고 하루 종일 그 냄새를 맡는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아이들이 페트병 안에 물은 아닌 것 같은 액체를 넣고 다닌 것을 본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믿을 수 없었고, 믿기 힘들었습니다. 그 어린 아이들이 배고픔과 고통을 잊기 위해선 언제 다시 먹을지 모르는 빵보다 그것에 취해있는 것을 차라리 선택했다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많은 아이들이 이제는 씻을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비바람을 피해 잘 수 있는 쉼터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그 중에 몇 몇은 따로 독립해서 본격적인 훈련을 하며 살만큼 진전이 있었다는 희망적 소식도 들었습니다. 꿈의학교 선생님들께서 우간다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흘려 보내고 싶다는 뜻으로 보내신 헌금을 쿠미대학에서 음발레로 흘려 보내 주셨기에 몇 번 다시 방문하면서 그 곳 책임자와 대화를 나누다가 알게 된 것입니다. 코로나의 확산세는 여전하지만 우간다인들에게 코로나보다 무서운 생계의 문제로 인해 모든 활동이 거의 재개되었고, 그래서 거리에는 다시 집을 떠나 방황하는 아이들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이 살 수 있는 지역을 찾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돕고자 계획 중에 있는데, 한 아이가 건물을 지키는 사설 보안업체 직원에게 사살 당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근래 일어났습니다. 그 아이의 시신을 거두어 함께 쉼터에 들어와 있는 아이들과 장례를 해주었고, 아직 거리에 남아있는 아이들은 한 때 나마 어울렸던 그 아이의 억울한 죽음에, 돌을 들어 던지며 시위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리고 못 배웠지만, 인간으로서 그들이 느낀 분노, 절망, 사회에 대한 반감을 예수님의 보혈로 덮어주시고 위로해 주시기를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동네 아이들이 눈치를 보는 무서운 어른 임을 돌아보게 됩니다. 또 위에 언급한 자매들이나 사정이 어려운 여러 현지인들에게 더 냉정하게 묻고 따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번 달부터 졸업하는 최고학년만 다시 학기를 시작해서 학비가 필요해 요청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올해 초 기록을 찾아보니 꽤나 큰 금액을 아이들 학비로 이미 지원해줬는데, 그 학기는 코로나로 인해 갑자기 끝마치는 바람에 학비를 다 내고도 수업은 다 받지 못했습니다. 수업료에 대한 영수증을 받지 못한 것과 지난 학기에 낸 수업료가 이월되는 것이 아닌가 해서 되물었는데, 답변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 요청에 답하지 않으면 도와줄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호의를 베풀되 사정이 딱하다고 해서 무조건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따져서 확신이 섰을 때 도와주는 나름의 원칙을 세우다 보니 많이 피곤하고 스트레스가 되기도 합니다. 한국 사람들 같이 확실하고 빠르게 그리고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아 급한 상황임에도 이 과정은 며칠 째 지속되기도 합니다. 상대방도 지치고 치사해서 요청하고 싶지 않고 싶다는 마음이 들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노력이 쌓이다 보면 상호 간에 소통의 방식을 이해하고, 신뢰가 더 쌓일 수 있다는 기대를 합니다. 결정은 했지만 마음이 흔들려, 학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러 선교사님들께 확인을 해 보았는데, 요청한 사람의 말처럼 모든 학교가 지난 학기에 다 냈건 못 냈건 이번 학기는 새로운 학비를 전액 다시 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다 낸 사람 입장에선 정말 억울할 만 한 일이고, 한국인인 제 사고 방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기록에 누가 얼마를 냈는지 다 있으니 그만큼 차감해주면 좋을 텐데 그러지 않는 것인지 그걸 못하는 것인지, 또 그런 학교에 대해 단합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인지 아리송하고 찜찜했습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니 제가 확인하고 싶어한 부분을 그가 다 채워주지 못했어도 그의 자녀를 위해 학비를 주었습니다. 상식이 상식대로 통하지 않을 때 부정적 감정이 생기고, 스트레스가 되지만 이 곳에 살면서 가장 먼저 적응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여러 선교사님들께 확인하는 과정에서 쿠미대학교는 당연히 지난 학기의 학비를 내지 못한 부분만 이번 학기에 더 받고, 학기가 짧아졌으니 오히려 학비를 줄어줘야 하지 않겠냐는 논의가 있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저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했을 뿐인데 제게는 감동이 되고, 이런 쿠미대학교에 하나님의 복이 더 넘쳐 흐르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다른 학교들도 그간 학비를 받지 못해 코로나로부터 보호해 줄 방역, 소독 물품 등을 구매해야 하는 재정과 교직원들의 월급을 줘야 하는 등의 여러 이유로 어쩔 수 없이 학비를 새로 걷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학교의 책임을 어려운 상황의 부모들(심지어 지난 학기에 어렵게 학비를 내고도 수업을 받지 못해 결손이 생긴 아이들)에게 전가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리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은 부모의 마음과 책임이 그것조차 수용하게 만드는 것인가? 쿠미대학교도 재정 상황이 늘 좋지 않아 힘든데 우간다의 여러 학교들과 다른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철학”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장은 손해라도 이 철학이 학교를 세워갈 것입니다.

 

저는 농장을 운영하며 돈에 대해서 철학이라기보다 좀 더 엄격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늘 주인의식을 강조하는 직원들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당장의 필요를 외면하고 꼭 제가 있을 때 요청하는 것입니다. 본인의 돈으로 먼저 해결했으면 문제가 더 커지지 않을 텐데, 그런 경우를 경험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직원이 뭐가 필요하다고 하길래 마침 잔돈이 없어 먼저 필요한 것을 사고 영수증을 주면 내가 돈을 주겠다고 했는데도, 계속 자기는 돈이 없다고 합니다. 월급날이 불과 2일전 이었는데… 거기서도 한참을 씨름하다 결국 그가 받아들이고 헤어졌는데, 다시 만날 때까지 일종의 테스트처럼 제가 바라는 결과를 정해놓고 기다렸습니다. 이런 태도는 사실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물품과 영수증을 보여주었고, 저는 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무리한 요구가 아닌 이상 이처럼 일을 진행할 수 있는 신뢰 관계를 계속 만들어갈 수 있도록 부탁했습니다. 난민캠프에서 만났던 자매 아이다도 우간다에서 다니던 학교가 있었는데, 고아원에 있는 동생들을 돌보러 남수단에 들어갔다가 코로나로 인해 돌아오고 있지 못했습니다. 마침 최고학년이 수업을 재개해 아이다도 돌아와야 하는데, 이 곳까지 올 차비와 와서 필요한 식비 등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업료는 본인의 교회에서 장학금으로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워낙 신뢰가 두터운 자매였지만 이 자매에게도 이 학교가 어떤 학교인지, 무엇을 배우는지, 졸업을 하면 어떤 진로를 갈 수 있는지, 우간다의 대학을 갈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지 등 많은 질문을 주고 받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가 자매를 의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자기를 보증할 수 있는 사람을 소개해주겠다 했지만, 거절했습니다. 나는 여전히 너를 믿고 다만 제대로 확인하면서 앞으로의 삶까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할 때 필요한 과정인 것에 대해 이해를 구했습니다. 제가 미리 보낸 남수단에서 우간다까지의 교통비를 대부분 병원비로 사용해 돈이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인터넷에서 조사한 환율과 자매가 쓴 금액이 차이가 나서 치료비로 그만큼의 돈을 썼다는 사실에 당황하기도 했는데, 이 부분은 남수단에 장병으로 파견된 제자에게 확인해볼 수 있었고, 지역마다 환율 차이를 다르게 적용한다는 것과 우간다 실링을 달러가 아닌 남수단 파운드로 바꿀 때에는 그 손실이 엄청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차비를 보내주고, 나머지 생활비는 우간다에 도착했을 때 우간다 실링으로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농장은 새로운 시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시점에 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동안 매주 양배추 값으로 2년전에 10000실링(한화 약 3000원)으로 시작해 2만실링으로 올랐다가 코로나로 비싸지기도 했다 하고 양도 부족하다 하여 3만실링(한화 1만원)까지 지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농장에 갔다가 근처 시장(주1회 상설시장, 코로나로 못 열리게 막았으나 최근 불법적으로 오픈)이 열렸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양배추 가격을 확인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큰 한 자루에 겨우 4000실링... 농장에는 그간 30000실링 만큼의 양배추가 있던 적 없고 늘 주말이면 아슬아슬 떨어져서 월요일에는 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양배추 비용도 일부러 금요일에 주고 왔었습니다. 그간 구입을 담당했던 알렉스에게 기도하고 진실을 말해달라 기회 주니 뭔가 고백하려 하고 눈물도 짓고 해서 더 독려해주었는데 결국 제가 듣고 싶었던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양배추 값을 매번 3만실링씩 빠짐없이 지불했다 하더라도 늘 농장이 적자라 주인의식을 갖고 운영비를 줄이자 했는데도 내 돈 아니라고 가격 협상 시도 하지 않은 책임감도 문제입니다. 그 날 이 문제로 씨름하다 저는 하루 종일 밥 굶고 잠도 안 왔는데, 알렉스도 말라리아 증상 있다고 갑자기 다른 직원을 불러 대신 농장을 지키게 하라는 말을 합니다. 그의 몸상태 보다는 무책임한 태도에 더 화가 나는 것을 겨우 다스렸고, 그도 결국 약을 먹고 농장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전날은 알렉스가 땅을 사고 집을 지어 이사를 했는데 아내가 무서워해서 밤근무를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해 한번 그의 집에 일부러 가 보았습니다. 여러 선물과 1년전 출생한 막내아들 출산축하금도 전해주고 밤마다 무서움에 시달리는 자매를 위해 기도하고 왔습니다. 땅 사고 집 짓는데 200만 실링(본인 월급 30만실링 전후. 보통 거의 매달 가불을 해야 함)이나 들었다는데 그 돈이 어디서 났는지 미심쩍었지만 이 일과 별개로 그저 양배추 값을 확인해본 것인데 이렇게 뒷돈을 챙겼었나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의 자립을 위한 프로젝트인데 막상 그가 자립한 상황이 불편하다니, 이상했습니다. 저는 그 동안 양배추 값이 너무 비싸다고 생각해서 몇 번이나 가격에 대해 묻고 다른 데서 찾아보라 최근에도 말했는데, 어제처럼 양배추가 시장에서 그냥 버려지기도 하고 싼 가격에 사올 수 있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뒷돈을 챙기지 않았더라도 이런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알렉스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되었습니다. 제 마음 속 어둠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농장은 자립 못했는데 본인만 자립. 작년에 계란 없어진 일로 6개월간 자숙의 시간을 가졌음에도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음. 6개월간 월급 없이 일하고 탕감 후 해고? 1년간 10만실링씩 자동 가불 후 해고? 아니면 경찰에 가서 해결? 매주 교회에서 설교하지만 하나님 두려워하지 않음. 유혹에 넘어갈 순 있으나 자백의 기회를 잡지 못한 것은 문제.

그러나 정말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깎을 수 있는 양배추 가격을 상인이 달라고 한 그대로 준 주인의식 없는 태도의 문제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기에 1주일간 계속 불편한 동행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시장이 열리는 다음 주가 되었고, 미리 상인과 지난 주의 가격으로 협상을 하면 제가 가서 돈을 주고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알렉스에게 전화가 와서 자기는 협상이 안 되고 원래 팔던 사람이 저랑 직접 얘기하기를 원한다 해서 찜찜한 마음으로 가봤습니다. 그는 다시 한 백에 10000실링을 받아야 한다고 딱 잘라 말하니 저도 기분이 나빴습니다. 오늘 농장에 가기 전 현지 물가를 잘 아는 이웃 아저씨도 4000실링 정도면 살 수 있다 했었습니다. 거듭 협상을 했는데 굽히지 않고, 지난 번에 제게 싸게 판 사람은 보이지 않아 물어보니 이 사람의 가격기준을 혼돈 시켜서인지 밀려난 것 같았습니다. 결국 이제 다른 데서 수고를 들여 싸게 사던지 아니면 이 사람과 끝까지 협상해야만 하는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3백에 30000실링에 사던 것을 20000실링으로, 겨우 10000실링을 아끼기 위해 많은 감정적 신체적 영적 에너지를 다 소비해 버렸습니다. 허탈하면서도 이 현지인에게 진 기분이 들었지만, 알렉스가 이 농장에 주인의식을 가지고 운영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지난 일주일간 강조했고, 몸소 보여주었다는 것에 위안을 삼았습니다. 또 하나는 알렉스에 대한 의심을 접고, 양배추를 비싼 가격에 팔려한 이 상인에게 더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서 제 마음 속 어둠을 내쫓았습니다. 처음엔 마음에 들지 않던 상인이었지만, 결국 서로 한 발씩 양보하여 협상가격을 받아들임으로 그의 밝아진 모습과 태도를 보니 그가 달리 보였습니다. 그도 힘들게 농사를 지어 먼 지역에서 여기까지 차를 렌트해 운송해오는데 제가 제시한 3백에 15000실링보다 겨우 5000실링(한화 1700원) 더 해줘서 보상의 기쁨을 누리게 해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도 시장이 파하는 시간에 남은 찌꺼기들은 더 서비스로 챙겨놓겠다 했습니다. 그래도 현지인들은 버리는 양배추를 비싸게 샀다고 저를 호구라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소진하지 않아도 될 신경과 에너지를 많이 뺏깁니다. 그들은 이방인을 돈 나오는 통로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 늘 속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정말 순환농업으로 우리가 양배추와 모든 재료를 재배하는 것도 방법인데, 그보다 더 쉬운 방법은 이 각박한 세상에서 호구가 되길 자처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원하신다면 말입니다. 근데 제가 아직 그게 안 됩니다. 이 사람들에게 계속 저울을 속이는 유혹을 제공하기 보다 정당한 값을 주고 받되 그의 처지에 긍휼함을 느끼고 돕는 복잡하고 어려운 길에서 헤매고 있는 듯 합니다.

 

이 양배추 사건으로 한 가지 더 도전이 되는 과제가 생겼습니다. 만약 알렉스가 과오를 범해 제 억측이 사실로 판명되었다면, 저는 정말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실 그간 쌓인 정과 스토리들을 통해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조그만 농장은 아직 자립도 못하고 있는 단계이지만 그래도 아주 희망이 없어 보이진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 이어갈 수도 있는데, 사람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친구가 없는 농장에서 과연 마음 편히 즐겁게 일할 수 있을까? 정직함을 기대하고, 소망하지만 막상 그런 사람이 온다 해도 알렉스를 대체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가 있었기에 지금의 농장이 있다고 생각하고, 저를 위한 농장이 아닌 그를 위한 농장이라는 마음이 듭니다.

 

아프리카에 눈이 내린다면? 한 번쯤 이런 상상을 하곤 합니다. 한 번도 눈을 보지 못한 우간다 아이들이 눈 내리는 날 신나게 뛰어 노는 생각만 해도 즐겁습니다. 그런데 정말, 어느 날 갑자기 평소와는 차원이 다른 빗소리가 들렸습니다. 창 밖을 내다보니 엄청난 우박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신기한 나머지 촬영을 하며, 차나 집에 피해가 가지 않기를 초조하게 바랬습니다. 근래 비가 오기 전에는 엄청 덥다가 비가 오면서 확 날씨가 쌀쌀해지는 것을 경험했는데, 이웃들의 옷차림은 다 바뀌었는데 한국인들은 얇고 짧은 것을 입으며 우리는 추위에 강하다는 말도 했었습니다. 지금이 우간다인들에게 겨울이라는 답을 들었는데, 우박은 이렇게 기온차가 확 나면서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우박으로 망가진 빗물통, 강한 비바람에 날려온 낙엽들로 난장판이 된 틈에서 아이들은 옷을 껴입고 나가 아프리카의 첫 눈을 즐겼습니다. 손이 시려워서 몇 초 잡을 수도 없는 우박들을 여기 저기 그릇에 담고 소꿉놀이 하는 얼굴에 미소가 만연합니다. 우박이 오기 며칠 전에 이웃에 이사온 형제들과도 이 날을 계기로 친해졌습니다. 매너가 좋고 차분한 성격의 오빠가 이사와 여자 아이들이 잘 따르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또래의 새로운 친구가 생겨 너무 감사합니다. 유치원에 다닐 때는 항상 친구들과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는 재미가 있었는데, 바로 코 앞에 함께 놀 수 있는 또래가 생겨 아이들도 더 밝아짐을 느낍니다.

 

10월 16일은 막내 들이의 첫 생일이었습니다. 56일 째에 한국을 떠나 우간다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아기를 지켜주신 하나님과 기도해주신 모든 분들과 사랑해주신 가족 이웃들에게 너무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누구를 초대하기도 부담스러워 그냥 조용히 가족끼리만 보내려고 했는데, 이웃의 선교사님들께서 꼭 같이 축하하자는 제안을 해주셨습니다. 음식도 같이 준비하고 다 같이 모이니 부모의 기대와 예상을 뛰어넘는 풍성한 식탁과 교제로 들이의 첫 생일을 기념할 수 있었습니다. 우간다에 와서 병치레 하지 않고, 밝고 건강하게 자라는 들이를 보며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더욱 크게 느낍니다. 우간다의 하늘과 햇살과 바람이 아이들의 생명이 되고 친구가 됩니다. 무엇보다 아내의 수고와 헌신이 있었기에 강이 산이 들이가 외로운 가운데서도 편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 아빠는 아내와 아이들만 우간다에 남기고 한국에 와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가족들만 남겨 놓고 우간다를 떠나야만 하는 결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가정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믿고, 아내를 믿고, 아이들을 믿고, 이웃 선교사님들을 믿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자가격리를 하며 다음 소식지에 이 이유를 적어 보낼까 합니다. 남겨진 가족들과 저의 치료를 위해 함께 기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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